세계 유명자동차의 이름은 사람 이름에서 나왔다. 포드자동차, 메르세데츠벤츠 등이 그렇다. 그래서 일본의 자동차도 닛산(日産)을 제외하고는 창립자의 이름을 대부분 쓰고 있다. 혼다, 스즈키등이 그렇고 토요타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자동차로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 된 토요타 자동차는 토요타 사키치(豊田佐吉)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요타 사키치는 1867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일본은 명치유신의 한 해 전으로 아직도 德川家가 권력을 잡고 있던 때이다.
토요타 사기치 (豊田佐吉) ⓒ대한뉴스
사기치(佐吉)의 어린 시절은 당시 '에도'(지금의 동경)의 쇼군(將軍) 저택에 10대의 어린 명치천황(明治天皇)이 낯설은 에도생활을 시작하고 있던 때에 해당한다.
당시 아직도 막부파(쇼군 지지파)들은 자신들이 관군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츠마(薩摩) 쵸슈(長州)의 반정부 藩士들의 반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 동북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때이다.
250년 쌓아온 덕천막부의 세력이 하루아침에 시들기에는 뿌리가 깊었다. 그래서 천황군은 '관군'을 마지막까지 소탕하기 위해서는 전진기지로 '에도'를 임시수도로 하여 천황을 그곳에 모셔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직도 에도 북쪽의 인심은 막부편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천황은 討幕혁명군, 당시는 攘夷尊王軍에 의해 임시수도가 된 '에도'에 살게 된 것이다.
천황이 자신의 왕궁을 떠나서 자기 신하이던 쇼군의 저택에 거처를 옮긴 것이다. 혁명 천황군의 에도 무혈입성 교섭이 성공하고 1867년 마지막 쇼군은 이른바 타이세이호우칸(大政奉還)이라는 이름으로 에도를 내주고 이에야스가 말년에 살던 후지산 아래 駿府(지금의 시즈오카)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때 쇼군과 함께 에도를 떠난 쇼군의 막부에 근무하던 학자, 관리들이 자그마치 14,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에도를 떠나 시즈오카쪽으로 몰려와 살게되자 조용했던 시즈오카, 그리고 인근 아이치현이 갑자기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개화며 서양문명이 뭔지 하면서 그들의 화제거리가 바다 건너 유럽에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쿠로후네(黑船)를 끌고와서 일본천하를 한번 놀라게 한 것이 결국 250년의 덕천막부의 군막을 걷고 말았다. 이로인해 시즈오카, 아이치로 낙향한 막부의 관리들은 서양을 진작 몰랐던 250년 막부의 쇄국정책을 후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시대배경 속에 사기치(佐吉)는 어머니가 옛날처럼 베틀에 앉아 어렵게 베짜는 것을 보고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하는 방직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동양적 효도에서 시작한 새로운 발명품 방직기는 일본 중부지역의 모노즈쿠리(제조업)의 선구가 된 셈이었다. 그는 그후 "綿業立國論"을 제창, 면포의 수출을 강조하였고 지금도 일본 10대 발명가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글 유주열(수요저널 고문, 전 나고야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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